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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에 찔린 호랑이’ 독립투사 김명식 “내 사망신고는 광복 후에 하라”

DailySeoulite 2024. 8. 14.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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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제의 폭정에 맞서 싸우던 독립투사 김명식. 그는 목숨을 건 항쟁 끝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소원은 단 하나, "내 사망신고는 광복 후에 하라"였습니다. 과연 김명식은 어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그의 절절한 외침에는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 김명식, 뜨거웠던 삶과 쓸쓸한 죽음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내 두 눈 부릅떠 일본이 멸망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

1943년 5월, 태평양 전쟁 한창이던 시기. 제주도에서 한 독립운동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명식.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일본의 멸망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젊은 시절, 김명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조선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1916년 도쿄에서 조선, 중국, 대만 학생들과 함께 ‘신아동맹당’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혁명 단체였습니다. 4년 후에는 서울에서 ‘사회혁명당’에 참여하며 사회주의 운동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이 단체는 조선 국내에서 처음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벽에 부딪히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였습니다. 김명식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을 이끈 선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921년에는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내지 간부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을 바탕으로 고려공산당의 기관지 발간을 책임졌고, 언론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알렸습니다. 특히 <동아일보> 1면에 61회에 걸쳐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글은 한국에 레닌과 볼셰비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또한 <신생활>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주필을 맡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글들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신생활>은 사회주의적 내용 때문에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김명식은 2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고문과 질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출소 후에도 건강은 악화되었고, 한쪽 다리가 짧아지고 청각 장애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글을 쓰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쓸쓸한 노년으로 이어졌습니다. 1940년 7월 이후에는 글쓰기를 중단하고 세상과 멀리 떨어져 지냈습니다. 김명식의 삶은 뜨거웠지만, 그의 죽음은 쓸쓸했습니다. 제주도에 여행을 간다면 그의 묘소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의 삶을 통해 올곧게 신념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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