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삼성 하청업체, 1만원 ‘쿨링 모자’도 아까웠나…죽음 내몰린 에어컨 설치기사

DailySeoulite 2024. 9. 4. 08:05
반응형

혹서기에 에어컨 설치는 필수지만, 설치 기사들의 열악한 환경은 외면당하고 있었습니다. 1만원짜리 쿨링 모자마저 아까웠던 삼성 하청업체, 과연 그들의 안전은 보장되었을까요? 뜨거운 여름, 차가운 현실 속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봅니다. 

 

폭염 속 에어컨 설치, 27살 청년의 죽음… 누구의 책임일까?

"정신질환 있냐" 물으며 사진만 보낸 회사, 1시간 방치된 청년

지난 8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전남 장성의 한 중학교 급식실에서 에어컨 설치 작업 중 27살 청년 양준혁씨가 숨졌습니다. 입사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당시 낮 기온은 34도까지 치솟았고, 급식실에는 선풍기 두 대만 겨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오후 4시 40분쯤 준혁씨는 밖으로 뛰쳐나가 구토를 반복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팀장과 동료들은 119 신고는커녕, 준혁씨가 쓰러진 사진을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며 "평소 정신질환이 있었느냐. 데려가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1시간 가까이 방치된 후에야 119에 신고가 접수되었고, 준혁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에어컨 설치는 '필수'지만, 설치 기사는 '비정규직'

에어컨은 전문 기사의 설치가 필수적인 제품입니다. 설치 서비스가 없으면 고객은 에어컨을 구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에어컨 설치 기사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입니다. 삼성전자는 가정용 에어컨 설치를 자회사 삼성로지텍에, 업소용 에어컨 설치를 지역별 하청업체에 맡기고 있습니다. 엘지전자 역시 가정용 에어컨 설치는 자회사 판토스에, 업소용 에어컨 설치는 지역 하청업체에 위탁합니다. 이러한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영세업체이며, 직원 수도 5명 미만인 경우가 많습니다. 준혁씨가 일했던 '유진테크시스템' 역시 직원 5명의 영세업체였습니다.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다 젖을 정도" 폭염 속 12시간 노동

준혁씨는 입사 첫날 12시간 동안 일을 했습니다.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다 젖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지만,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준혁씨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폭염 속에서도 안전에 대한 교육이나 대책 없이 노동에 내몰린 현실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입니다.

직고용된 수리기사는 '온열질환 예방 문자' 받지만, 설치 기사는 '모른다'

가전 제조사에 직고용된 수리기사들은 폭염주의보 발효 시 대처 방안과 온열질환 예방법 등이 담긴 안내 문자를 받습니다. 하지만 하청업체 소속 설치 기사들은 온열질환에 대한 교육이나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사고를 접하기 전까지 온열질환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여름철이 워낙 바쁜 시기이고, 누가 제대로 알려준 적도 없었어요." 충남 천안에서 일하는 에어컨 설치 기사 ㄱ씨의 말입니다. 노조의 투쟁으로 직고용된 수리기사들은 산재 위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하청업체 소속 설치 기사들은 여전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치킨 게임과 같은 '저가 경쟁'… 안전은 뒷전

하청업체들은 원청의 외주화로 인해 '치킨 게임'과 같은 저가 경쟁을 벌입니다. 업소용 에어컨 설치 공사는 가정용 에어컨 공사보다 규모와 금액이 크지만, 가전 제조사가 정해놓은 견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영세업체들은 저가 수주를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준혁씨는 사망 전날 "냉각 모자가 필요하다"고 요청했지만, 업체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안전에 대한 비용과 관심은 없었던 것입니다.

'재하청' 구조는 위험을 더욱 증폭시킨다

하청 단계가 거듭될수록 이윤은 줄고 작업 속도는 빨라집니다. 특히 방학 안에 공사를 마쳐야 하는 학교 공사는 더욱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에어컨 공사 자체가 가격을 낮게 써내 일감을 따는 구조예요. 거기다 전문점-설치업체-재재하청업체로 내려가면 마진은 더 줄고 공사기한은 정해져 있으니 굉장히 바빠요." 에어컨 기사 ㄱ씨의 말입니다.

원청의 '안전 관리'는 허술하기만 하다

삼성과 엘지는 하청업체를 선정할 때 자사가 발급한 설치 기사 자격증을 몇 명이 보유했는지만 따지고, 업체의 직접 시공 여부나 안전 관리 역량, 작업량 대비 인원 수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준혁씨의 가족은 하청업체와 함께 원청인 삼성전자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하청업체의 잘못도 있지만, 애초에 이런 구조를 만든 원청의 책임도 크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장애물' 만들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가전 제조사에 대한 하도급 금지가 어렵다면, 업계 공동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정 규모 이상 하청업체에만 도급을 주거나, 안전 조처가 안 된 현장은 공사를 중지시키는 등 최소한의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준혁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구조 속에서 누가 또다시 희생될 것인가요?
반응형